신라와 고려 범종의 특징: 천년의 소리가 빚어낸 예술적 미학

범종(梵鐘)은 불교 문화권에서 사찰의 주요 신앙적·의식적 도구로 쓰이는 종을 가리키는 용어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 제작된 범종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서, 예술적 감각, 종교적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신라와 고려의 범종은 동아시아 종 문화에서 독특하고 깊은 영향력을 발휘해왔으며, 그 형태적 특징과 예술적 성취, 역사적 의미를 면밀히 살펴보면, 단순한 금속 공예품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신라와 고려 범종을 중심으로 그 특징과 공통점, 차이점, 제작 기술, 종소리의 비밀, 종에 새겨진 문양과 글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 속에 깃든 예술혼과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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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불교문화와 범종: 종은 왜 사찰에 울렸나
범종은 불교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불교의 나라에 사찰을 세우면, 그곳엔 반드시 소리를 통해 신도들을 모으거나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종이 있었다. 사찰 범종은 아침 저녁 예불 시간, 큰 행사나 의식을 알리는 신호로 쓰였으며, 소리는 단순한 음향을 넘어 우주 질서와 인간 마음의 정화를 상징했다.

신라와 고려 시대는 불교가 국가 이념으로 숭상되던 시기로, 범종 또한 자연스럽게 중요한 예배 도구이자 미술 공예품으로 자리잡았다. 범종 소리로 시작되는 새벽 예불은 수행자들의 정신을 맑히고, 신도들에게는 불법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매개체였다. 이렇듯 범종은 단순한 금속 덩어리가 아닌, 신앙과 문화의 결합체로 기능하며, 이를 통해 조상들의 내면세계와 미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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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범종: 초기 불교미술 전통과 독창적 형식의 발전
신라 시대 범종은 범종 제작 기술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독특한 위상을 확립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불교 수용과 공예 기술 발전이 신라 범종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통일신라 시기에 이르러서는 청동기 제작 기술이 정점에 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섬세하고 웅장한 범종들이 탄생했다.

신라 범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다. 이 종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크기와 무게, 정교한 문양, 맑고 아득한 종소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범종의 특징을 집약한 결정체로, 두드러진 요소로는 종신(鐘身)에 새겨진 비천(飛天)과 연화문(蓮花文), 그리고 안쪽에 공명판을 둔 특이한 구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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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범종의 특징: 음향공학적 우수성과 조형미
신라 범종은 단순히 소리를 내는 도구가 아니라, 치밀한 계산과 심미성이 결합된 예술품이다.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두드러진 음통(音筒): 종 상부에는 음통이라 불리는 용뉴(龍鈕) 아래 부분이 있다. 음통은 음향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종소리가 더욱 멀리 울리도록 한다. 신라 범종의 용뉴는 주로 용이 종을 물고 있는 형상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아, 종 위로 웅장한 용의 이미지가 펼쳐진다.
2. 균형 잡힌 종신 비례: 신라 범종은 높이와 지름의 비율이 정교하게 계산되어 맑고 긴 음색을 내며, 종의 벽 두께 또한 밀도 높게 균일화되어 있다. 이는 당시 금속주조 기술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3. 고유한 문양과 비천상 조각: 종 표면에는 비천(하늘을 나는 신선이나 천인)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불법을 찬탄하며 우아한 곡선미로 장식 효과를 더한다. 연꽃문, 구름문 등 불교적 상징 문양들도 종 표면에 새겨져 종교적 의미와 미적 재미를 모두 잡았다.
4. 독특한 음색을 위한 설계: 신라 범종은 종 내부에 음영(音影)을 최적화하는 장치와 두께 변화를 통해 특정한 주파수 대역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긴 울림과 고운 음색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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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의 위상: 신라 범종의 정수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범종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종은 높이 약 3.75m, 무게 약 18.9톤으로,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다. 종 제작 과정에서 수차례 실패를 겪은 것으로 전해지며, 그만큼 기법적 완성도가 뛰어나다.

종의 몸체 곳곳에는 연꽃과 비천, 보주(寶珠) 문양이 교차하며, 불교적 상징을 가득 품고 있다. 특히 종 내부에는 음향을 조정하기 위한 비밀스러운 장치들이 있어, 타종(打鐘) 시 맑고 긴 여운을 남긴다. 전해지는 설화(‘에밀레’ 전설)로 인해 이 종은 한국 민족문화와 정서 속 깊이 자리 잡았으며, 그 신비롭고 쓸쓸한 음색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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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범종: 신라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미학의 탄생
고려 시대 범종은 신라 범종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고려 고유의 예술적 감각과 시대정신을 반영했다. 고려는 불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번영하였으며, 특히 고려 초기에는 신라 양식이 짙게 남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독자적인 장식 문양과 양식을 개발했다.

고려 범종은 전체적으로 신라 범종에 비해 장식이 다채롭고, 정치·사회적 변화와 함께 발전한 금속 공예 기술이 녹아 있다. 예를 들어 고려 범종은 용뉴의 형상이 신라 때보다 더욱 화려해지거나, 비천상의 표현이 섬세함을 더해가는 등 고유한 미적 특질을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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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범종의 특징: 신라 계승에서 고려 양식으로

1. 문양의 다양화와 섬세함: 고려 범종은 표면 장식이 더욱 정교하고 복잡해진다. 신라 범종이 비교적 단정하고 간결한 문양 배치를 선호했다면, 고려 범종은 연꽃, 덩굴무늬,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문양을 풍부하게 활용한다.
2. 명문(銘文)의 추가와 기록성 강화: 고려 시대 범종에는 종을 만든 시기, 제작자, 봉헌 목적 등에 관한 명문이 새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시대적 배경, 제작 의도, 주조 과정의 정보가 후대에 전해지며, 범종은 역사적 기록 매체로서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3. 기법의 진보: 고려 장인들은 신라로부터 전해진 주조 기술을 바탕으로 더 정교하고 균질한 청동주조 기술을 발달시켰다. 종소리의 명징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주조 기술뿐만 아니라 합금비율, 냉각방식, 후처리 등 다양한 요소가 개선되었다.
4. 국제 교류의 영향: 고려 시대에는 송, 원 등 주변 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했다. 이로 인해 고려 범종 문양이나 형태에 외래 양식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반영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문화적 융합이 범종 예술의 다양성을 한층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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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 주조 기술과 제작 과정: 장인 정신의 결정체
신라와 고려 범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주조 기술과 섬세한 장인 정신이 필요했다. 범종 제작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디자인 및 원형 제작: 종의 크기, 형태, 문양을 사전에 설계한다. 이후 점토나 왁스 등 재료를 사용해 종의 모형을 만든다.
2. 거푸집 제작: 내형과 외형 거푸집을 만들어, 그 사이 공간에 녹인 청동을 부어넣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거푸집 제작은 매우 정밀한 작업으로, 나중에 종 표면에 문양이 그대로 찍혀 나와야 하기 때문에 섬세한 문양 조각이 필요하다.
3. 합금 조절과 주조: 청동합금(주로 구리+주석 또는 구리+주석+납 비율)을 적절히 섞고 녹여서 거푸집에 붓는다. 이때 합금비율과 온도 조절이 관건이며, 주조 과정에서 기포나 불순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한다.
4. 냉각 및 정련: 금속이 굳고 거푸집을 제거한 뒤 종 표면을 다듬는다. 필요하다면 문양을 세밀하게 정교화하고, 종표면을 연마한다. 마지막으로 음향 테스트를 통해 종소리가 제대로 울리는지 확인한다.

이 과정은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릴 수 있고, 종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장인이 협업한다. 그 결과 탄생한 범종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시간과 정성, 기술의 결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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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의 소리와 음향학적 비밀
범종 소리는 왜 그렇게 매혹적인가? 그 답은 금속 합금비율, 두께, 내부 구조, 종의 크기, 치는 위치와 힘 등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서 특정한 공명주파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려 범종은 종 내부 공간 구조를 치밀하게 설계해서 특정 주파수 대역에서 오래 지속되는 울림을 구현했다. 특히 종 주위에 부착된 돌출부(유곽, 유두)나, 종입면의 두께 변화는 음색 변화를 유도한다. 이러한 미세 조정 덕분에 종소리는 단순히 ‘땡’하고 끝나지 않고, 긴 여운을 남기며 듣는 이의 마음을 깊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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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에 새겨진 명문과 상징: 역사와 신앙의 기록
고려 범종을 포함해 많은 범종에는 제작 연대, 발원자(奉獻者), 제작 의도 등을 기록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당대 사람들이 왜 이 종을 만들었으며, 누구를 위해 봉헌했는지, 어떤 소망을 담았는지 알 수 있다. 범종은 단지 소리를 내는 도구가 아니라, 역사·종교·사회적 배경을 담은 기억의 캔버스인 셈이다.

또한 범종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불교 교리를 상징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연꽃은 불교에서 청정함과 해탈을 상징하고, 비천상은 불법을 찬미하는 존재로서 종을 치면 불음(佛音)이 퍼져나가는 광경을 암시한다. 이러한 상징 요소들은 범종을 통해 종교적 심상을 강화하고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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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 문화의 현대적 의미: 전승과 재해석
신라와 고려 범종은 과거 유산일 뿐만 아니라 현대적 의미도 크다. 현재에도 사찰에서는 아침저녁 타종을 통해 범종 소리를 울리며, 이는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관광객에게도 매력적 요소다. 또한 금속 공예 및 주조 기술 연구자들은 옛 범종의 기술을 분석하여 현대 산업에 응용하기도 한다. 음향 공학자나 음악학자들은 범종 소리를 분석해 소리의 과학적 특성을 해명하고, 새로운 악기 제작에 영감을 얻는다.

나아가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범종 문양과 형태를 미술, 디자인 작품에 접목하거나, 범종 소리를 샘플링하여 현대 음악에 녹이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창출된다. 이런 시도들은 우리 문화유산을 단순히 박물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예술적 원천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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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뻗어가는 범종 문화: 동아시아 공예와 소리의 유산
동아시아 지역에는 중국, 일본 역시 범종 문화를 꽃피웠다. 이들 나라와 비교했을 때, 신라·고려 범종은 독특한 미감과 음색을 뽐낸다. 국제적으로 이러한 범종은 한국의 전통문화 홍보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해외 박물관 전시나 문화 교류 행사를 통해 범종이 소개되면, 관객들은 동양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감각을 이해하는 매개체로 삼을 수 있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신라·고려 범종 비교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 각국 간 문화 교류를 추적하거나, 특정 양식의 변화를 통해 국제적 예술 사조 변천을 해명할 수 있다. 범종은 눈으로 보는 예술품이자 귀로 듣는 음악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역사·문화의 비밀을 간직한 타임캡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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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천년의 시간과 예술이 녹아든 종소리
신라와 고려 범종은 수백, 수천 년 전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맑은 소리와 아름다운 문양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이는 단지 금속 공예 기술의 성취가 아니라, 조상들의 정신적 유산이 살아 숨 쉬는 증거다. 종을 바라보면 장인들의 숨결과 신앙심이 느껴지고, 종소리를 들으면 사찰 뜰에서 고요히 피어나는 연꽃향을 상상하게 된다.

이 범종들은 우리 문화유산의 정수로서 존재하며, 계승할 가치가 충만하다. 앞으로도 연구자와 예술가, 장인, 대중들이 범종을 연구하고 감상하며,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질 때, 신라·고려 범종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문화적 뿌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