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우리나라가 러시아랑 조약 같은 거 맺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역사의 거대한 파도가 한반도를 덮쳤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우리 조상들은 당시 '아라사(俄羅斯)'라 불리던 제정 러시아와 매우 복잡하고도 운명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청나라의 쇠퇴, 일본의 부상, 그리고 서구 열강의 진출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조선(이후 대한제국)은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라는 거대한 '북방의 곰'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독립을 지키기 위한 희망의 동아줄이었고, 때로는 더 큰 위험을 불러오는 아슬아슬한 외교적 도박이었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구한말 대한제국의 운명을 좌우했던 러시아와의 주요 조약과 협약,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첫 만남, 희망과 불안의 '조러수호통상조약' (1884년) 🤝
조선이 러시아와 맺은 최초의 공식적인 조약은 1884년 7월 7일에 체결된 '조러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입니다.
- 역사적 배경: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1882) 이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극심해지고, 일본의 군사적 압박 또한 거세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특정 세력이 조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더 강한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힘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이때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남하 정책을 통해 아시아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거대한 제국, 러시아였습니다.
- 조약의 주요 내용:
- 상호 우호 관계 및 영사 파견: 양국은 영원한 우호 관계를 맺고, 상대국에 외교 대표와 영사를 파견할 수 있다.
- 통상 및 항해의 자유: 양국 국민은 지정된 항구에서 자유롭게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선박의 자유로운 항해를 보장한다.
- 치외법권(영사재판권): 러시아인이 조선 내에서 죄를 지었을 경우, 러시아 영사가 재판한다.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 요소)
- 최혜국 대우: 만약 조선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어 더 유리한 조건을 허락할 경우, 그 혜택은 러시아에도 자동으로 적용된다.
- 역사적 의의와 한계: 이 조약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러시아라는 강력한 파트너를 얻어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려는 희망이 담겨 있었죠. 하지만 동시에,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전이 더욱 치열해지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합법적으로 한반도에 영향력을 투사할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2.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다, '아관파천' (1896년) 🏰
조약 체결 이후에도 조선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특히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그 정점은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었습니다.
왕비가 궁궐 안에서 무참히 시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고종은 극심한 공포와 신변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일본의 칼날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종은 마지막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러시아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훗날 순종)는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긴 채 삼엄한 경계를 뚫고 경복궁을 탈출하여,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를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거처를 옮김)했다'는 의미에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릅니다.
- 아관파천의 결과: 국왕의 신병을 확보한 러시아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친일 내각은 즉시 붕괴되고, 이완용, 이범진 등 친러파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그 빈자리를 러시아가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1년 동안 러시아의 보호 아래 단발령을 철회하고, 국정 운영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러시아는 압록강 유역의 채벌권, 경원·종성의 채광권 등 막대한 이권을 침탈해갔습니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왕의 신변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생존 전략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의 국권이 외세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3.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흥정: 조선 없는 '조선 논의' ♟️
아관파천으로 한반도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가자, 당황한 일본은 러시아와 직접 협상에 나섭니다. 이때부터 조선의 운명은 당사자인 조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일본의 도쿄에서 결정되기 시작합니다.
- 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년 5월): 아관파천 직후, 러시아의 베베르 공사와 일본의 고무라 공사가 서울에서 만나 맺은 협정입니다. 일본이 고종의 환궁을 러시아에 요청하고, 친러 내각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군 주둔의 필요성을 상호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1896년 6월): 러시아를 방문한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가 맺은 비밀 협정입니다. 양국이 조선의 재정, 군사 문제에 공동으로 관여하며, 사실상 조선을 '공동 보호'하에 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 니시-로젠 협정 (1898년 4월): 양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표면적으로 합의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상공업 이익에 관한 일본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고, 일본은 러시아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합의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러시아가 사실상 묵인해 주는 대가로, 러시아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받으려는 타협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협상들은 조선을 하나의 독립 국가가 아닌, 두 제국주의 국가가 나눠 먹을 '이권 대상'으로 취급했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4. 마지막 불꽃, 그리고 좌절: 러일전쟁과 한반도의 운명 ⚔️
결국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1904년 2월 8일,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합니다. 대한제국은 이 전쟁에서 '국외중립'을 선언했지만, 양측 모두 이를 무시했습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특히 동해에서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전멸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1905년 9월,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조약의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에 탁월한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監理)의 조치를 취함에 있어 이를 저지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이는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일본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낸 일본에게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불과 두 달 뒤인 1905년 11월, 일본은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 Q&A: 러시아와의 관계, 이것이 궁금해요!
Q1: 아관파천은 고종의 현명한 선택이었나요, 아니면 굴욕적인 일이었나요?
A: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복합적인 사건입니다. 한 나라의 군주가 외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은 국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굴욕적인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살해 위협이 현실적이었던 상황에서, 고종 개인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보장받고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Q2: 당시 러시아는 정말 조선을 도와주려고 했던 건가요?
A: 순수한 선의로 도우려 했다기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러시아의 최우선 목표는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를 확보하고 극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면서 일본의 남하를 막는 것이 러시아의 국가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에 조선에 접근했던 것입니다. 결국 제국주의 시대의 외교 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었습니다.
Q3: 만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A: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가정'입니다. 만약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완전한 독립을 유지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대신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놓인 '보호국'이나 '위성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수도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역사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맺음말
희망을 품고 맺었던 첫 수호조약에서 시작하여, 국왕의 피신, 열강의 흥정, 그리고 전쟁의 패배로 인한 국권 상실까지. 구한말 러시아와의 관계사는 '힘없는 국가의 외교'가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깁니다.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국가의 운명은 다른 나라의 선의가 아닌, 우리 스스로의 힘(국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오늘날의 국제 정세 속에서 100여 년 전 조상들의 아슬아슬했던 외교와 좌절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큰 지혜와 통찰을 줄 것입니다.
'교육과 학문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6G가 온다: 5G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 '진짜 만물인터넷'이 만드는 미래 세상 (ft. 상용화 시기, 주요 변화, 기대 효과 총정리) (0) | 2025.09.24 |
---|---|
아기 다리는 자라면서 바로 잡힌다? O자형, X자형 다리에 대한 모든 것 (5) | 2025.08.31 |
복(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이유: 중국 전통 속 숨겨진 이야기와 상징 (3) | 2025.08.30 |
소금, 조리의 마법사: 맛을 완성하는 비밀의 키 (2) | 2025.08.29 |
왜 화장실 조명에서 찍은 셀카가 더 예뻐 보일까? 조명 속 과학과 심리학 이야기 (3) | 2025.08.28 |